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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 논란 , 마지막 유언

이슈팜 2025. 3. 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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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서양 신학문을 배웠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며 근대적 시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옥중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미국에서도 독립외교를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헌법을 제정했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대한민국의 초기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이끌어내 한반도의 공산화를 저지했고, 한미동맹을 통해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한 후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5년 사망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초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업적

대한인국민회 활동,  1910년대에 미국 내 한인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외교 활동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내는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 문제를 알리려 했습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 정부에 로비 활동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갈등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정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독단적 행보로 인해 탄핵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 긍정적

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제 외교( 독립운동과 외교)

  •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함.
  • 1948년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음.
  • 한미 상호방위조약(1953) 체결을 통해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공고히 함.
  •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 기여함.

② 6.25 전쟁(한국전쟁) 지도 및 국가 재건(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 및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해 유엔군을 파병받음.
  •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당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여 북한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함.
  • 전쟁 이후 미국의 경제 원조를 적극 유치하여 국가 재건의 기틀을 마련함.

③ 반공 정책과 경제 기반 마련

  • 반공 이념을 기반으로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함.
  • 농지개혁(1950~1952)을 통해 지주제도를 폐지하고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농민들의 삶을 개선함.
  • 한강 인도교를 복구하고, 도로 및 철도망을 재정비하는 등 기초적인 산업 기반을 구축함.
  • '이승만 라인'을 선포해 독도를 지키고 해양 주권을 강화했습니다.

2. 부정적

① 독재 정치와 장기 집권 시도( 권위주의적 통치)

  •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간접 선거제도를 활용해 당선됨.
  •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여 재선됨.
  •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3선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함.
  •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하다가 4.19 혁명으로 실각함.

② 인권 탄압과 언론 통제

  • 반공주의를 명목으로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함.
  • 보도연맹 사건(1950)으로 인해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함.
  •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정적들을 탄압하고 야당을 억압함.

③ 한미관계 의존 심화 및 경제 정책 미흡

  • 미국 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립적인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데 실패함.
  • 1950년대 경제 성장이 더딘 편이었고, 산업화보다는 반공 정책과 정치적 안정에 초점을 맞춤.
  • 6.25 전쟁 후 실업과 물가 상승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국민 생활이 어려워짐.

○ 논란

① 독립자금과 사리사욕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외교적 노선을 걸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쌓았고, 개인적인 이익을 챙겼다는 비판이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부족합니다. 반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그가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합니다.

반민특위 해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9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광복 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과제였던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활동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경찰과 정부의 방해가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949년 6월 6일, 서울에서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반민특위 위원들과 관계자들이 폭행당하고 체포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력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 경찰과 정치 세력들이 반민특위에 대한 반발을 키우는 것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정부 측의 공식적인 입장은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했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많은 친일 인사들이 이후 한국 사회의 핵심 권력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친일 청산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6·25 전쟁과 한강다리 폭파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방송을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6월 27일 대전으로 피신했습니다. 6월 28일 새벽,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군과 시민들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한강대교가 폭파되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당시 군이 독자적으로 판단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승만 정권이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틀 만에 북한군은 서울 근처까지 진격하였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6월 27일 새벽 3시경,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들은 특별 열차를 통해 서울을 떠났습니다. 같은 날 오전 11시,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서울 방어를 포기하고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부터 공병대는 한강 인도교에 약 3,600파운드의 TNT를 설치하였으며, 밤 11시 30분에 폭파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폭파 예정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6월 28일 새벽 1시경, 북한군 전차부대가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는 정보가 전해졌고, 이에 따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1시 45분에 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일부 사단장들의 항의로 폭파 명령을 철회하려 했으나, 전달이 지연되어 새벽 2시 20분에 현장 지휘관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폭파를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리 위를 건너던 군인, 경찰, 민간인 등이 희생되었으며, 정확한 사망자 수는 추정치로 200~800명에 달합니다.

폭파로 인해 국군 주력 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과 물자 수송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한, 폭파 당시 충분한 사전 경고가 없었기 때문에 다리 위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9월 21일에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1964년, 그의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법원은 폭파 명령이 상부에서 내려진 것임을 인정하여 최 대령의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전쟁 초기의 혼란과 지휘 체계의 문제를 드러낸 비극적인 사례로, 민간인과 군인들의 희생을 초래한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하와이에서의 망명 생활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1960년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사실상 망명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5년 7월 19일, 9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 퇴임 직후 이승만은 다시 정계에 복귀하려 했으나, 국내 여론과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 미국에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연금을 지급받았으며, 측근들과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 그러나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후, 이승만의 귀국 요청은 거절당했습니다.
  • 국내에서는 이승만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정권의 입장과 국민 정서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의 마지막 유언

이승만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유해는 조국이 통일된 다음에 가져다 달라."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 7월 27일 국가장(國家葬)으로 이승만의 유해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고, 그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나라를 이끌었지만, 독재와 부정부패로 인해 국민들의 저항을 받았고 결국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 총평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한국전쟁을 이끌며 국가의 기초를 다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재 정치를 통한 장기 집권 시도, 인권 탄압, 경제 정책 실패 등의 문제로 인해 4.19 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공과 과가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변하지 않은 진실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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